그림자 판 사나이
철학자 한병철의 문제적 저작 <고통 없는 사회>는 에른스트 융어의 대담한 선언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. "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. 그러면 네가 누군이지 말해주겠다."
한병철에게 긍정심리학은 진통제이며 마취제이다. 오늘날 고통 경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고통이 무의미한 것으로 지각된다는 것이다. 그러나 고통은 무의미하지 않다. 모든 진실은 고통스럽고, 고통은 결속이자 자아의 윤곽을 드러내며 고통은 현실이다.
이야기는 고통과 카타르시스를 교환해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장치였다. 이야기 속에서 한 인물이 큰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은 그 인물이 고통의 의미를 안다는 뜻이다.
한 시간의 요가 세션을 마친 뒤 메트에 편안히 누워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를 때마다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치밀어오르는 희미한 불안이 있다. 이것이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이고, 만일 이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온다면 나는 속절없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. 지금까지는 나는 고통의 의미를 찾아 견디기보다 몸 가볍게 달아나며 마법 구두를 신은 '그림자 판 사나이'로 살았다.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인가? 내가 기꺼이 견디고자 할 의미있는 고통은 어떤 것일까?
- 김영하, 《단 한 번의 삶》 중에서